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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하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어젯 밤의 일이었다.
간밤에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를 듣고 
부랴부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집을 막 나서던 참이었다.
그 때 평소 존경하는, 많은 지도와 격려를 주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잘 지내지?". 
살짝 취기 섞인 선배의 안부 인사에 반가움이 들었다.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 서로의 안부,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짧게 나눈 뒤 제대로 한 번 보자는 약속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운동장으로 달렸다.

혼자서 불이 꺼진 고요한 운동장을 뛰다 보니 
내가 떠나온 사람들, 나를 떠나간 사람, 사랑하는 사람, 
아니 사랑했던 사람들...
2년이란 세월 속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스쳐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열망과 노력. 
그 일을 하면서 느꼈던 보람, 사랑. 
그리고 이 모든 걸 떠나 보내며 느꼈던 절망과 고독, 상실감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가슴 속을 흔들었다.

향년 29세, 어느 허름한 심야 극장에서 요절한 
전 중아일보 기자이자 시인이었던 기형도. 
그의 시 <빈 집>이 떠올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문학에서 '잃다'와 '쓰다'는 동의어라는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소중한 것의 상실에 나는 
이렇게 글을 끄적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기형도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나는, 
그가 이런 표현을 어떻게 내뱉을 수 있었는지, 
그 어떤 상실을 경험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몇 번의 상실과 고독만으로 세상과 담을 쌓진 말자.
기형도는 시에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궜고 
사랑은 빈 집에 갇혔다고 말했다. 
허나 문은 안에서 잠긴다. 눈을 뜨고 잠궜던 문을 열고 나서자. 
그 뿐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고 쌓아가자. 
그러다 언젠가 돌아보면 희미한 기억과 미소만이 남을 것이니...

<짧은 글짓기 하나-17.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