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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우린 의심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산다.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는 바에야, 사람 속 알 수 없으니 너나 나나 어찌할 도리는 없다. 
고통(샤덴)과 기쁨(프로이데)을 합친 ‘샤덴프로이데’라는 독일어가 있다. 
잘나가는 누군가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됐을 때 기쁨을 느낀다는 인간 내면의 중층적 심리구조를 표현한 단어다. 
그것이 작동한 것만 아니라면 의심의 미덕은 유효하다. 거짓에 도전하는 유일한 장치이고, 폭력적인 믿음을 극복하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늘 실체적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가는 과정은 지난하다. 법의 공간에서조차 진실은 때로 무력하다.
오 제이 심슨의 변호를 맡아 무죄를 이끌어냈던 하버드 로스쿨 앨런 더쇼비츠 교수가 쓴 <합리적 의심>이란 책이 있다. 
심슨은 상식적으로 보면 의심없이 범인이었다. 차에서는 피 묻은 장갑과 혈흔이 발견됐다. 
변호인단은 검찰 쪽에서 증거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몇가지 결정적 실수와 증인 중 일부가 
과거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한 전력이 있음을 드러냈다. 배심원단에게는 납득이 가는 의심이었고, 심슨은 풀려났다. 
더쇼비츠 교수는 “‘합리적인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게 법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합리적 의심의 힘은 실체적 진실과 법의 간극만큼 강하다.

최근 한 연예인 학력의 진위 문제로 시끄럽다.
 이 연예인과 미국을 동행 취재한 방송물이 나갔음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쪽은 ‘칼’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익명성에 기댄 집단적 광기라는 비난이 이어지자, 합리적 의심을 욕하지 말란다. 
합리적 의심의 목적은 실체적 진실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순간 합리적 의심도 폭력이 된다. 
사이트에 올라온 불리한 증거를 삭제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방식은 목적을 의심하게 한다. 
천안함 사건 이후 정부 태도가 그렇지 않은가.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